조선의 풍속화 속 일꾼들은 논둑에 둘러앉아 사발을 들고 있다. 사발에서는 따뜻한 김이 오르고, 국수는 장국을 머금어 부드럽게 끊긴다. 신 김치의 시큼하고 매운 즙과 서늘한 막걸리가 땀으로 마른 입을 깨운다. 과자 몇 조각을 집어 먹는 장면이 아니다. 새참은 긴 노동일 사이에 끼워 넣은 또 하나의 끼니에 가까웠다.
새참은 하루에 몇 번 먹었을까
농번기의 하루는 해보다 먼저 시작됐다. 새벽밥을 먹고 들로 나가 모를 심거나 김을 매면 점심까지의 간격이 길었다. 허리를 굽힌 채 물논을 옮겨 다니고 괭이와 낫을 쓰는 날에는 세 끼만으로 허기를 견디기 어려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아침을 이르게 먹은 날에는 오전 10시 무렵 첫 새참을 먹고, 점심과 저녁 사이인 오후 4시 무렵 두 번째 새참을 먹었다고 기록한다. 하루 세 끼 사이에 한두 번의 식사가 더 들어간 셈이다. 여름에는 해가 길었고, 저녁밥까지 남은 노동도 길었다.
그 시간이 전국에서 똑같았던 것은 아니다. 해가 뜨는 때와 맡은 일, 집에서 논까지의 거리에 따라 새참의 횟수도 달라졌다. 손목시계가 흔하지 않던 때에는 해의 높이와 배고픔으로 때를 짐작했고,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도착하면 일을 멈췄다.
새참은 간식이라고 부르기에는 양이 많았다. 사발에 밥을 담고 김치와 나물을 곁들이거나, 국수장국을 한 그릇씩 말아 냈다. 끼니보다 상차림은 단순했지만 양은 과자나 과일 한 조각에 머물지 않았다.
먹는 시간은 곧 쉬는 시간이었다. 호미를 놓고 그늘이나 논둑으로 모여 앉는 순간, 각자 흩어져 있던 일꾼이 다시 한 무리가 됐다. 누가 몇 줄을 더 심었는지, 어느 논에 물이 모자라는지도 이때 오갔다.

풍속화에 남은 새참
조영석의 『사제첩』에 실린 새참 장면에는 방 안도, 반듯한 상도 없다. 사람들은 땅에 낮게 앉아 사발을 손에 들었다. 오른쪽에서는 음식을 담은 광주리 곁으로 그릇이 건너가고, 가운데 사람들은 무릎을 세우거나 등을 보인 채 먹는다.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도 비슷한 장면이 남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화첩의 스물네 번째 그림 제목은 ‘점심’이다. 웃옷을 벗은 장정들이 한 사발씩 들고 있고, 술을 따르는 아이와 밥소쿠리를 지키는 여인이 함께 등장한다.
두 그림에서 음식은 화려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밥과 반찬을 나누고 술을 서로 따라 주었다. 무엇을 먹었는지보다 어떻게 모여 먹었는지가 먼저 보이는 구성이다.
여러 사람 몫의 쌀을 씻고 국을 끓인 뒤, 그릇과 반찬을 채반에 얹어 일터까지 옮겨야 했다. 새참에는 들일뿐 아니라 음식을 준비하고 운반하는 노동도 필요했다.
들밥은 어떻게 운반했을까
집과 논이 가까우면 잠깐 돌아와 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터가 멀거나 품앗이 인원이 많으면 왕복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들밥’ 항목에는 여인들이 상이나 넓은 채반에 음식을 담아 이고 나갔다고 적혀 있다.
그릇은 이동을 견뎌야 했다. 반찬 수를 늘리기보다 한 그릇에 먹기 쉬운 장국밥과 국수장국이 어울렸다. 보리밥에는 푸성귀국과 고추장, 상추쌈이 붙었다. 탱글한 보리알에 짭짤한 고추장을 조금 묻히고, 서늘한 상추를 겹쳐 싸면 거친 밥알과 아삭한 잎이 함께 씹혔다.
국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항아리나 솥째 옮기고, 논둑에 도착한 뒤 그릇에 나눠 담기도 했다. 이동하는 동안 밥은 조금 굳고 국은 한김 식었다. 그래서 뜨거움보다 짠 장과 신 김치, 된장의 구수한 향처럼 식어도 또렷한 맛이 들밥에 잘 남았다.
여러 집이 함께 모를 심는 날에는 식구 수보다 큰 밥솥이 필요했다. 품을 빌린 집은 일꾼의 식사까지 마련했고, 음식의 양과 때를 맞추는 일도 농사 일정에 포함됐다. 음식이 늦게 도착하면 일꾼 모두가 제때 쉬지 못했다.
들밥은 장소를 가리키고 새참은 끼니 사이의 시간을 가리키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같은 식사를 두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점심을 들에서 먹으면 들밥이었고, 오전이나 오후의 사이 끼니도 같은 논둑에 놓였다.
여러 사람의 새참은 누가 준비했을까
오전 열 시에 논둑에서 밥을 먹으려면 부엌에서는 훨씬 일찍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새벽밥상을 물린 뒤 다시 쌀이나 보리를 씻고, 국을 끓이고, 김치와 장을 덜었다. 일꾼이 열 명이면 사발과 수저도 열 벌이었다. 새참 준비는 소풍 도시락이 아니라 농번기의 또 다른 작업이었다.
운반할 음식은 부엌에서 바로 먹는 밥상과 준비 방법이 달랐다. 국은 식지 않게 담아야 했고, 장국은 길에서 넘치지 않아야 했다. 한낮에는 쉰 음식이 생기지 않도록 양을 헤아렸다. 접시 여러 장보다 김치 한 보시기와 장 한 종지가 자주 등장한 데에는 이런 이동 조건도 있었다.
채반을 머리에 이면 두 손을 쓸 수 있지만 좁은 논둑과 비탈길에서는 균형을 잃기 쉬웠다. 솥이나 주전자까지 더해지면 한 사람이 전부 나를 수 없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릇을 펴고, 뒤이어 온 사람이 국과 술을 내려놓는 식으로 밥상이 완성됐다.
풍속화에서 새참을 나르고 음식을 나누는 인물은 주로 여성으로 그려진다. 들에서 사발을 든 장정들의 휴식 뒤에는 불 앞에서 여러 사람 몫을 마련하고 무거운 채반을 옮긴 노동이 있었다. 논일뿐 아니라 새참을 만들고 나르는 일도 농번기의 중요한 노동이었다.
왜 국수가 자주 나왔을까
옛 새참을 설명하는 자료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음식은 국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국수를 보편적인 새참 음식으로 꼽는다. 솥 하나에 많은 양을 삶아 여러 그릇으로 빠르게 나눌 수 있었고, 멸치나 장으로 간한 국물을 들이켜면 땀 흘린 뒤 마른 입 안에 따뜻하고 짭짤한 물기가 돌아왔다.
국수라고 모두 같은 그릇은 아니었다. 따뜻한 장국에 만 면은 부드럽고 미끄럽게 넘어갔고, 양념에 비빈 국수에서는 고추장의 단맛과 식초의 산미가 먼저 느껴졌다. 고명은 잔칫상처럼 여러 색을 내기보다 신 김치와 볶은 애호박, 파를 띄운 양념장처럼 준비해 둔 재료가 중심이었다.
면은 불기 전에 먹어야 했다. 집에서 완성해 먼 논까지 나르면 국물을 머금어 굵고 부드러워졌다. 갓 삶은 면의 탄력은 줄었지만 장국이 속까지 배어 젓가락보다 사발째 후루룩 들이켜기 쉬웠다. 삶은 면과 장국을 따로 옮겨 현장에서 합치면 면발의 저항을 조금 더 남길 수 있었다.
밥을 낼 때도 반찬은 간결했다. 김치와 나물, 된장이나 고추장, 상추 같은 푸성귀가 한두 가지씩 붙었다. 오래 앉아 먹는 상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기 전 짧게 차린 식사였다.

새참에는 왜 막걸리가 놓였을까
새참 곁에는 막걸리가 자주 놓였다. 쌀이나 잡곡으로 빚은 탁한 술은 큰 주전자나 항아리에 담겨 들로 나갔고, 잔보다 사발에 따랐다. 살짝 시큼한 발효 향 뒤로 곡물의 단맛이 오고, 미세한 탄산이 혀를 가볍게 찔렀다. 새참을 ‘술참’이라고 부른 지역의 말도 이 풍경에서 나왔다.
막걸리를 마시면 김치와 된장, 고추장 뒤에 남은 짠맛이 줄었다. 차갑게 식힌 술은 더운 날 입안의 열을 낮췄고, 상온의 막걸리는 걸쭉한 질감과 누룩 향이 더 또렷했다. 음식 앞뒤에 한 사발씩 돌았으며 모심기 소리를 이끄는 선소리꾼이 목을 축이기도 했다.
다만 옛 농촌의 술참을 오늘의 작업 음료처럼 옮길 수는 없다. 농기계가 없던 시절의 풍속을 설명하는 기록과, 기계를 다루고 차량을 운전하는 현재의 안전 기준은 다르다. 막걸리는 새참의 역사를 보여주는 음식이지 갈증을 푸는 물의 자리는 아니다.
새참은 영양만 보충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같은 두레와 품앗이에 속한 사람들이 사발을 돌리며 숨을 고르고, 다시 어느 줄부터 일을 시작할지 정하는 짧은 공동 식사였다.
계절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새참에는 정해진 차림표가 없었다. 보리가 나온 철에는 보리밥이 중심이 됐고, 텃밭의 상추와 고추, 된장이 곁에 붙었다. 『농가월령가』 5월령에도 들로 내가는 밥상에 보리밥과 국, 고추장, 상추쌈이 등장한다.
한여름의 국수는 뜨거운 밥보다 빨리 넘어갔다. 가을걷이 무렵에는 햇곡식과 집에 저장해 둔 반찬이 밥소쿠리에 담겼다. 산간과 평야, 바닷가의 저장 음식이 달랐으니 새참의 간도 한 가지일 수 없었다.
음식 선택에는 맛만큼 운반성이 작용했다. 접시가 많이 필요한 전이나 국물이 쉽게 새는 찌개보다, 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밥과 국수, 손에 쥘 수 있는 떡과 삶은 곡물이 들에 나가기 수월했다. 남은 음식은 다시 싸 와야 했고, 한낮 볕 아래 오래 둘 수도 없었다.
같은 마을에서도 큰 모내기날과 가족끼리 김을 매는 날의 새참은 달랐다. 일꾼이 많으면 솥째 끓인 국수나 장국밥이 편했고, 몇 사람이 일하면 아침에 남은 밥과 김치만으로도 자리가 차려졌다.

농기계가 들어온 뒤 달라진 새참
손모내기에는 한 줄로 늘어선 사람이 필요했다. 모판에서 모를 쪄 나르는 사람, 줄을 맞추는 사람, 허리를 굽혀 심는 사람이 함께 움직였다. 새참도 그 인원에 맞춰 큰 소쿠리와 솥으로 준비됐다.
이앙기가 들어오자 같은 면적의 논에 필요한 사람이 줄었다. KBS 『한국인의 밥상』은 기계 모내기가 보편화되면서 손모내기와 함께 여럿이 나누던 들밥 문화도 줄었다고 기록했다. 한 마을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일을 멈추고 먹는 일도 드물어졌다.
기계화 뒤에도 농번기에는 물과 커피, 빵, 과일, 국수를 챙겼다. 다만 집집이 품을 바꾸고 큰 솥을 함께 비우던 구조는 이전보다 작아졌다.
도로와 전화가 보급되면서 새참을 마련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집에서 이고 온 장국밥 대신 배달된 자장면을 논둑에서 받아 먹는 풍경이 생겼다. 음식을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이 같은 품앗이 안에 있지 않은 경우도 늘었다.
플라스틱 그릇과 보온병, 일회용 포장은 무거운 사기 사발과 솥을 대신했다. 한 사람이 농기계를 멈추고 차 안에서 간단히 먹는 새참도 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쉬던 시간은 개인의 작업 속도에 맞춰 나뉘었다.
오늘의 새참은 편의점 봉지나 배달 상자에 담겨 올 수도 있다. 요즘도 농촌에서는 오전이나 오후에 일을 멈추고 먹는 음식을 새참이라고 부른다.
새참 메뉴를 정한 조건
쌀쌀한 날에는 뜨거운 장국에 만 국수가 손과 속을 함께 데웠다. 더운 날에는 보리밥에 서늘한 상추와 고추장을 얹거나, 새콤하게 비빈 국수로 마른 입맛을 깨웠다.
사람이 많으면 큰 솥의 국수와 장국밥을 빠르게 나눴고, 몇 사람뿐이면 남은 밥과 김치, 떡과 삶은 감자도 새참이 됐다. 메뉴는 계절과 일꾼 수, 들까지 옮기는 거리에 따라 달라졌다.

새참을 먹는 짧은 휴식
새참은 거창한 별식이 아니었다. 보리밥과 푸성귀국, 국수 한 그릇처럼 그날 부엌에서 많이 마련할 수 있고 들까지 옮길 수 있는 음식이었다. 농번기에는 이런 음식이 오전과 오후의 휴식 시간을 만들었다.
조영석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누구도 반듯하게 정면을 보지 않는다. 사발을 들고, 옆 사람에게 몸을 기울이고, 광주리 쪽으로 손을 뻗는다. 곧 다시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의 자세다.
오전 열 시와 오후 네 시가 되면 밥소쿠리가 논둑에 내려왔다. 모를 심던 사람과 밥을 나르던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함께 쉬었다.
더 확인하고 싶다면
새참의 시간과 음식은 지역·계절·일의 종류에 따라 달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립중앙박물관의 공공 자료를 중심으로 공통적인 농촌 풍속을 정리하고, 기계화 이후의 변화는 방송 기록을 참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