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2만명이 찾는 독립출판물, 진(Zine)의 귀환

복사기로 몇 장을 찍고 스테이플러로 묶어도 책이 된다. 출판사의 선택과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건너뛴 이 작은 출판물은 이제 서울의 미술관과 책방, 청소년센터까지 들어왔고 국내 최대 아트북페어에는 해마다 2만 명 넘게 모인다.

진을 펼쳐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진 The Museum of Reclaimed Urban Space · CC BY-SA 4.0

진(Zine)은 내용뿐 아니라 종이·판형·부수·유통까지 제작자가 정하는 소규모 독립출판물이다. 공공 문화 공간으로 들어온 최근 흐름을 따라가면서 상업 출판과 다른 선택권, 제작 비용과 행사 뒤 유통의 어려움, 관람객 수를 판매량으로 오해하면 안 되는 이유를 함께 짚었다.

2026년 3월, 진이 독립서점을 넘어 공공 문화 공간으로 들어왔다

변화가 뚜렷해진 시기는 2026년 3월이다. 서울 신도시에서 열린 ‘한국의 진 도서관’은 국내 진 문화를 1987년부터 오늘까지 단체와 세대별 출판물로 나눠 보여주고 관련 다큐멘터리도 상영했다. 몇 부만 만들어 교환하다 사라지기 쉬웠던 인쇄물을 하나의 연구·기록 대상으로 모았다는 점에서, 진이 독립서점 한쪽의 물건을 넘어 보존해야 할 문화로 다뤄지기 시작한 장면이었다.

그 뒤 진은 서로 다른 공공 프로그램에 연달아 등장했다. 4월 27일 발표된 서울형책방 70곳의 프로그램에는 ‘zine으로 기록하는 시시콜콜 서울’이 포함됐고, 5월 서울사진미술관에서는 열두 명이 세 차례에 걸쳐 사진 진을 만들었다. 8월에는 하자센터가 만 16~24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개인 진과 공동 진을 만드는 무료 열 차례 작업장을 열었으며, 8월 13일에는 각자의 낱장을 모듈형 공동 진으로 설계하는 다섯 번째 수업까지 진행됐다.

이 움직임의 규모를 보여주는 행사가 2009년 시작한 서울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이다. 2024년에는 225팀 이상과 해마다 2만 명 넘는 관람객을 모았고 2025년에는 해외 40팀을 포함한 역대 최대 251팀이 참가했으며, 올해 행사는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예정돼 있다. 종이가 갑자기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주변부에서 이어진 제작 방식이 3월의 기록 전시에서 11월의 대형 페어까지 하나의 문화 일정으로 연결된 것이다.

서로 다른 크기와 제본 방식으로 만든 진이 책장에 꽂혀 있는 모습
진에는 정해진 판형이나 제본법이 없다. 복사한 종이를 접어 한 장으로 만들기도 하고 손으로 꿰매거나 소량 인쇄해 묶기도 하는데, 이 불균일함이 대량 출판물과 가장 먼저 갈라지는 지점이다.사진 Sherlock808 · CC BY-SA 4.0

피드를 올리는 대신 종이를 접으면 편집권이 전부 내 것이 된다

진의 뿌리는 과학소설 팬들이 만든 팬진과 1950~60년대 만화 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펑크와 페미니즘·퀴어 커뮤니티처럼 기존 매체에서 자리를 얻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유통하는 방식으로 넓어졌다. 출판사의 심사도 광고주의 요구도 없으니 몇 부를 찍을지와 어떤 내용을 넣을지를 제작자가 정한다.

온라인 게시물도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플랫폼이 정한 화면과 추천 순서 안에서 읽히고, 계정이 사라지면 함께 묻히기 쉽다. 반면 진은 종이와 크기, 제본, 페이지 순서까지 내용이 되며 한 사람이 건넨 물건이 다른 사람의 책장에 남는다. Barnard Zine Library가 20년 동안 1만4000점 넘는 진을 모은 것도 온라인에 올리지 않은 친밀한 기록을 보존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진의 경쟁력은 인쇄물이 디지털보다 편해서가 아니라 불편함을 통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여덟 쪽만 만들어도 완결된 세계가 되고 조회 수가 적어도 실패가 아니며, 행사에서 만든 사람과 읽는 사람이 대화하는 순간에는 플랫폼이 관계의 중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종이와 인쇄소, 독립서점은 웃지만 제작자가 꼭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진이 늘면 소량 인쇄와 리소그래프·제본을 맡는 작업실, 독립서점, 아트북페어 운영자와 워크숍 기획자가 함께 시장을 만든다. 유어마인드가 7월에 연 24만 원짜리 4주 진 만들기 수업은 최대 다섯 명 정원으로 매진됐는데, 진이 완성품 판매를 넘어 배우고 함께 만드는 유료 경험으로 확장됐다는 신호다.

그렇다고 제작자의 수익이 커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수십 부만 찍으면 권당 인쇄비가 높고 행사 참가비와 운송비, 팔리지 않은 재고가 남으며 ISBN과 일반 서점 유통망 밖에 있는 책은 행사가 끝난 뒤 독자를 만나기 어렵다. 서울시가 2024년 행사에서 독립출판은 판매와 수익 창출이 쉽지 않다고 짚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용의 자유에는 책임도 따른다. 개인 경험을 쓰다 타인의 사생활을 드러내거나 허락받지 않은 사진과 이미지를 그대로 인쇄할 수 있고, 소량 출판물은 절판 뒤 기록이 통째로 사라지기 쉽다. 반대로 기관과 브랜드가 진의 거친 형식을 보기 좋은 굿즈로만 가져가면 심사와 자본을 벗어나려던 문화가 하나의 유행하는 미감으로 좁아질 수 있다.

지금의 진은 대중 출판의 대체재보다 작은 목소리의 기반에 가깝다

8월 13일 현재 확인되는 변화는 분명하다. 1987년 이후 국내 기록을 모으는 전시가 생겼고, 서울의 책방과 미술관·청소년센터가 진을 프로그램으로 다루며, 11월에는 2만 명 규모의 아트북페어가 다시 열린다. 제작과 보존, 판매와 교육이 따로 움직이던 단계에서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되는 중이다.

다만 베스트셀러 판매량이나 전체 독립출판 시장 규모처럼 비교 가능한 통계는 아직 부족하다. 2만 명은 페어 방문객 수이고 251팀은 참가자 수일 뿐, 제작자 한 명이 몇 권을 팔고 다음 해에도 계속 만드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종이책의 대부활’보다 ‘작은 출판의 입구가 넓어졌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다.

다음에 볼 것은 2026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최종 참가팀과 방문객, 행사 밖에서 진을 상시 판매하는 책방의 증가, 워크숍을 마친 첫 제작자가 두 번째 책까지 이어가는 비율이다. 그 숫자가 따라온다면 진은 잠깐 예쁜 종이 물건을 만드는 유행이 아니라 알고리즘 밖에서 목소리를 남기는 출판 기반으로 더 오래 갈 수 있다.

SOURCES

더 확인하고 싶다면

순위·조회수·판매량은 집계 기준이 서로 다르다. 아래 원문에서 발표 시점과 수치의 범위를 따로 확인했다.

UPDATE TIP정보가 달라졌습니까?수정 제보하기 +

이름·연락처를 적지 마세요. 제보 내용과 중복 접수를 막기 위한 독자 식별자가 저장됩니다. 개인정보 안내